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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아이 책을 고르다가 두 살용 한글 책을 보고 멈칫했습니다. 다섯 살 첫째는 아직 한글을 제대로 모르는데, 두 살부터 시작하는 책이 이렇게 많다니요. 그날 바로 학습지를 샀고, 한글 영상도 찾아서 틀어줬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 뭔가 빠진 느낌이었어요. 그 빠진 게 무엇인지 알기까지, 냉장고 하나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게 냉장고야"를 외웠지만
학습지를 처음 펼친 날, 냉장고 그림 옆에 적힌 글자를 짚으며 말했습니다. "이게 냉장고야." 몇 번 반복하자 첫째도 곧잘 따라 했어요. 생각보다 쉽게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냉' 한 글자만 따로 보여주자, 첫째는 멍하니 쳐다만 봤습니다. '냉장고'라는 세 글자를 그림처럼 통째로 외웠을 뿐, 각 글자가 어떤 소리인지는 전혀 몰랐던 거예요. 그러니 조금만 다른 글자가 나오면 막혔고, 막히면 금방 흥미를 잃었습니다.
한글 영상도 비슷했습니다. 화면 앞에서는 꽤 집중했어요. '사과', '바나나'도 금방 외웠고요. 그런데 '사자'를 보여주니 읽지 못했습니다. 영상에 나온 단어만 알 뿐, 거기서 더 넓어지지 않았던 거죠.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단어를 더 많이 외우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글자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원리였다는 걸요. 외운 단어는 거기서 끝나지만, 원리를 알면 스스로 넓혀갈 수 있으니까요.
소리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순서를 바꿨습니다. 글자를 보여주기 전에 소리부터 입으로 익히게 했어요. "아, 이, 우" 같은 모음 소리를 먼저 놀이처럼 하고, 거기에 자음 소리를 붙이는 식으로요. "그" 하고 "아"를 붙이면 "가"가 되는 원리를 알려준 거예요.
학습지는 솔직히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10분 정도 앉아 있더니, 다음 날부터는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간식이나 놀이를 조건으로 걸어야 겨우 펼쳤고, 그마저도 3분을 넘기기 어려웠습니다. 억지로 앉힐수록 한글이 싫어질 것 같아서 학습지는 내려놓았어요.
쓰기도 서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직 손힘이 약한 아이에게 글자를 쓰게 하면 한글 자체를 싫어하게 될 것 같았거든요. 대신 선 긋기, 동그라미 그리기, 점 찍기를 놀이로만 하고 있어요.
시작 시기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학교 들어가기 1년 전쯤 시작해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한글을 늦게 떼서 입학 초에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서, 마냥 손 놓고 있기는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가르치기"보다 "익숙하게 하기"였어요. 지금은 소리와 놀이로 친해지는 시기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냉장고 앞에서 들린 "냉-장-고!"
학습지 대신 집 안 곳곳에 글자 이름표를 붙였습니다. 냉장고, 의자, 신발장처럼 매일 보는 물건마다요. 따로 가르치지 않고 그냥 붙여만 뒀어요.
2주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첫째가 냉장고 앞에 서더니 이름표를 손으로 짚으며 또박또박 읽었어요. "냉-장-고!" 단 3초였지만, 학습지를 붙잡고 씨름하던 30분보다 훨씬 의미 있게 느껴졌습니다. 아이가 글자를 소리로 읽어낸 첫 순간이었으니까요. 가르치려고 애쓸 때는 안 되던 일이, 그냥 곁에 두었을 때 일어났다는 게 지금도 신기합니다.
제 말투도 돌아봤습니다
그러면서 제 말투도 돌아보게 됐습니다. 저는 평소 말이 빠르고, "밥 먹어", "씻어", "자자"처럼 짧은 지시가 대부분이었어요. 맞벌이로 바쁘다 보니 아이와 나누는 말이 대부분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말뿐이었던 거죠. 한글을 알려주겠다면서 정작 아이가 들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문장을 천천히, 단어마다 또렷하게 말하려고 합니다. 질문할 때는 대답할 시간도 충분히 주고요. 며칠 만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첫째가 새 단어를 듣고 따라 말하는 일이 조금씩 늘었습니다.
지금 한글을 못 읽는다고 뒤처진 건 아니라는 걸 이번에 배웠어요. 방법보다 순서가 중요했습니다. 소리를 먼저, 쓰기는 손이 준비된 다음에, 그리고 글자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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